시편 137장 바벨론 강가에서
1 바벨론의 강가에서 우리가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가운데 있는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들을 매달았도다.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들이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요구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들이 기쁨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시온의 노래들 중 하나를 우리에게 노래하라.”
4 우리가 어떻게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이 시편이 성경의 어떤 장면보다 포로기의 절망을 날것으로 전달한다. 수금들을 매달았다 — 연주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정복자들이 오락을 요구한다. “시온의 노래를 불러라.” 그 요구 자체가 굴욕이다. 성전 찬양이 식민지 오락이 될 때. “이방 땅에서 어떻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 이 질문이 포로기 신학의 핵심 위기다. 하나님은 땅에 묶인 분인가, 아닌가. 에스겔이 바벨론에서 비전을 받는 것이 이 위기에 대한 답이다.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그 능력을 잃기를.
6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나의 가장 큰 기쁨 위에 높이지 않는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기를.
음악가의 저주다. 오른손이 능력을 잃는 것, 혀가 붙는 것 — 연주와 노래를 영원히 잃는 것을 각오한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기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악기를 걸어두었으나, 예루살렘을 향한 기억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7 여호와여, 에돔 자손들이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하소서. 그들이 말했습니다. “헐어라, 헐어라, 그 기초까지.”
8 바벨론의 딸이여, 망해야 할 자여, 네가 우리에게 행한 것을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도다.
9 네 어린 것들을 잡아 바위에 메어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 마지막 두 절이 시편 137편을 가장 불편한 시편으로 만든다. 아기를 바위에 내치는 것에 복이 있다는 선언. 많은 독자들이 이 구절에서 멈춘다. 편집하거나 삭제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절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기도다 — 당위가 아니라 고통에서 나온 울부짖음이다. 역전을 원하는 절박한 감정의 언어. 이 감정을 하나님 앞에 놓는 것이 시편의 정직함이다. 시편은 우리가 “이래야 한다”는 감정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느끼는 것을 다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에 실제로 한 것 — 그들의 어린 것들을 바위에 내쳤다(이사야 13:16). 피해자의 감정이 가해자에게 동일한 것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약은 원수 사랑을 가르친다. 그러나 신약도 시편 137편을 성경에서 삭제하지 않았다. 두 진리가 모두 성경 안에 있다. 복수를 원하는 감정은 실재한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과, 그것을 직접 행하는 것은 다르다.
다음 장 — 주께서 나를 살피셨나이다. 내가 어디로 피하리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