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1장 왕비가 오지 않았다
백팔십 일의 잔치
1 아하수에로(Ahasuerus)가 왕이었다. 인도(India)에서 에디오피아(Ethiopia · ㉸ 에티오피아)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렸다.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어로 크샤야르샤, 그리스어로 크세르크세스다. 역사에서는 크세르크세스 1세(BC 486-465 재위)로 불린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왕 — 그리스 침공으로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스파르타 300 전사를 쓰러뜨리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에게 대패한 바로 그 왕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그 살라미스 전투(BC 480) 전후로 배치된다.
2 그 때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Susa · ㉸ 수사) 궁성에 앉아 있었다.
수산은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수도 중 하나였다. 현재 이란 서남부 후제스탄 주에 위치한다. 1851년 영국 지리학자 윌리엄 케닛 로프터스(William Kennett Loftus)가 발굴을 시작했고, 이후 프랑스 조사단이 1884년부터 대규모 발굴을 진행해 다리오 1세의 왕궁 유적을 확인했다. 에스더서가 묘사하는 화려한 궁전은 고고학적으로 실재했다.
3 그 왕위 삼 년에 왕이 자기 모든 고관과 신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페르시아와 메대의 장수들과 각 지방의 귀족들과 관리들이 그 앞에 있었다.
4 왕이 여러 날 동안 — 백팔십 일 동안 — 자기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자기 위엄의 혁혁함을 드러냈다.
백팔십 일, 즉 여섯 달이다. 이 기간은 단순한 연회가 아니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는 BC 481년, 그리스 원정 준비를 위해 제국 전역의 지휘관들을 수산에 집결시켰다. 6개월의 잔치는 군사 작전 기획 회의와 충성 확인의 자리였을 것이다.
칠 일의 마지막 잔치
5 이 날들이 끝날 때에 왕이 수산 궁성 안 뜰 후원에서 왕궁 모든 백성에게 크고 작은 자를 막론하고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6 흰 면포와 청색 베로 만든 차일이 백색 면사로 만든 줄과 자줏빛 줄로 은고리에 꿰어 대리석(marble) 기둥에 늘어뜨렸다. 침상이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고, 마루는 대리석과 각색 보석으로 깔려 있었다.
7 음료는 금 그릇에 담아 각 그릇을 달리하여 왕의 풍성한 예물대로 내놓았고, 왕의 주류도 하사하여 그 수에 제한이 없었다.
8 왕이 명령을 내려 각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했으니, 왕의 집 모든 신하로 각 사람의 뜻대로 행하게 했다.
페르시아의 잔치 문화는 고대 근동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했다. 다리오 1세 시대(BC 522-486)의 페르세폴리스 부조에는 수백 명이 동시에 시중드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각각 다른 금 그릇을 쓴다는 기록은 당시 페르시아 왕실의 금속 세공술을 보여준다. 1930년대 페르세폴리스 발굴에서 왕실 창고 문서 수천 점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잔치 배식 목록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와스디의 거절
9 왕후 와스디(Vashti · ㉸ 와스티)도 아하수에로 왕의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다.
10 제칠일에 왕이 술에 취하여 기분이 좋았다. 므후만(Mehuman), 비스다(Biztha), 하르보나(Harbona), 빅다(Bigtha), 아박다(Abagtha), 세달(Zethar), 가르가스(Carkas) 등 일곱 내시에게 명령했다.
11 “왕후 와스디를 왕관을 씌워 왕 앞으로 데려오라. 그녀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관원들에게 보이라.” 와스디는 아리따웠다.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가 내시들로 전하는 왕명을 듣고 오기를 거절했다.
왕이 심히 노했다. 노기가 속에서 불 같이 타올랐다.
와스디의 거절 이유를 본문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고대 페르시아 관습에서 왕비가 술판에서 낯선 남자들 앞에 전시되는 것은 존엄의 침해였다. 헤로도토스(BC 5세기) 의 『역사』 7권은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의 그리스식 이름)의 왕비를 아메스트리스(Amestris) 로 기록한다.
동일 인물설: 19세기 독일 학자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의 『이스라엘과 유대의 역사』가 와스디 = 아메스트리스를 제안했다. 1944년 루이스 패튼(Lewis Bayles Paton) 의 ICC 에스더 주석도 이 노선을 따랐다.
별개 인물설: 헤로도토스는 아메스트리스를 크세르크세스의 유일한 왕비로 묘사하며 와스디를 모른다. 1979년 칼 무어(Carey Moore) 의 앵커성서주석 에스더는 두 이름의 음운적 거리(와스디 vs 아메스트리스)를 들어 동일시를 거부한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궁정 디테일은 정확하나 역사 연대기보다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디아스포라 서사로 읽는 것이 다수설이다.
왕비의 운명을 논하다
13 왕이 때를 알고 규례를 아는 박사들에게 물었다. 왕이 율법과 규례를 아는 모든 자에게 묻는 것이 관례였다.
14 왕과 가까운 자들은 페르시아와 메대의 일곱 방백 가르스나(Carshena), 세달(Shethar), 아드마다(Admatha), 다시스(Tarshish), 메레스(Meres), 마르스나(Marsena), 므무간(Memucan)이었다. 이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었다.
15 왕이 물었다.
“왕후 와스디가 아하수에로 왕이 내시들로 내린 왕명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법규대로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16 므무간이 왕과 방백들 앞에서 대답했다.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하수에로 왕 모든 지방의 모든 방백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했습니다.
17 왕후의 이 일이 모든 여인에게 알려지면 그들이 남편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와스디를 명령했으나 오지 않았다 하면, 이 말을 들은 여자들이 다 자기 남편을 같은 눈으로 볼 것입니다.
18 오늘 페르시아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이 일을 들으면 왕의 모든 방백에게 그렇게 말할 것이니, 멸시와 노여움이 많아질 것입니다.
19 만약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왕후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되 페르시아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할 수 없게 하시고,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20 왕의 명령이 온 나라에 두루 반포되면, 모든 여인이 남편을 존경할 것입니다. 높고 낮고를 막론하고요.”
“변개할 수 없는 법”은 에스더서 전체에서 중요한 장치가 된다. 페르시아와 메대의 법은 한번 공포되면 왕도 취소하지 못한다는 원칙이었다. 이 원칙이 훗날 하만의 칙령과, 그것을 막기 위한 에스더의 두 번째 칙령 청원으로 이어진다.
21 이 말이 왕과 모든 방백의 마음에 들었다.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했다.
22 조서를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작성하여 왕의 모든 지방에 보냈다. 남편이 자기 집을 주관하게 하고, 그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에스더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야훼”도 없고 “엘로힘”도 없다. 구약 정경 중 유일한 책이다. 그러나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사건 — 와스디의 거절, 잠 못 이룬 왕, 하만의 처형대 — 이 하나의 결말로 수렴된다. 섭리는 이름 없이 일한다.
다음 장 — 왕비의 빈자리가 생겼다. 제국 전역에서 처녀들을 모은다. 그 중에 유대 소녀 하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