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빗기 1장 포로지에서 지킨 의로움
토빗기(Book of Tobit)는 기원전 2세기경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이 책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개신교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그리스어 70인역(LXX)을 통해 전해졌으며, 쿰란 사해 사본에서도 아람어·히브리어 단편이 발견되었다.
납탈리 출신 토빗
1 이것은 토빗(Tobit)의 이야기다.
그는 납탈리(Naphtali) 지파 출신으로,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Nineveh)에서 포로로 살았다.
2 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Shalmaneser)가 이스라엘 북왕국을 정복했을 때, 토빗도 함께 끌려왔다. 그의 고향은 갈릴래아 위쪽 티스베(Thisbe) 마을이었다.
3 토빗은 포로 생활 내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다고 기록한다.
“나는 진리의 길을 걸었다. 자선을 베풀었다. 동족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주었다.”
4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온 가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러 단으로 올라갈 때, 토빗 혼자만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를 드렸다.
기원전 931년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두 개를 세운 뒤, 북왕국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 대신 그 우상을 섬겼다(열왕기상 12장 28-29절). 토빗이 홀로 예루살렘을 고집한 것은 동족 다수와 정반대 선택이었다.
포로지의 삶
5 니네베에서 토빗은 아내 안나(Anna)와 아들 토비야(Tobiah)와 함께 살았다.
6 그는 포로 동족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나눠주었다.
7 십일조를 꼬박꼬박 챙겼다. 첫 번째 십일조는 예루살렘 성전에 바쳤고, 두 번째는 직접 먹고, 세 번째는 고아와 과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외국인에게 주었다.
8 열네 살 때부터 이미 이렇게 해왔다고 그는 회상했다.
왕의 총신이 된 토빗
9 살만에세르 왕 밑에서 토빗은 신임을 얻었다.
10 그는 왕의 심부름으로 메디아(Media) 지방에도 자주 다녔다. 그 과정에서 친척 가바엘(Gabael)에게 은 열 달란트를 맡겨 두었다.
11 살만에세르가 죽자 그의 아들 산헤립(Sennacherib)이 왕이 되었다.
12 상황이 바뀌었다. 토빗이 누리던 자유와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살만에세르 5세는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거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열왕기하 17장 6절). 그의 뒤를 이은 산헤립은 기원전 705-681년에 통치했다.
시신 매장 — 목숨을 건 의무
13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가 패주하고 돌아온 뒤,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는 이스라엘 출신 포로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14 토빗은 몰래 시신들을 거두어 묻어주었다.
15 왕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빗은 달아났다. 재산을 몽땅 몰수당했다.
16 아내 안나와 아들 토비야 외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대 근동에서 시신을 묻어주지 않는 것은 심한 모욕이자 저주였다. 이스라엘 전통에서도 매장은 신성한 의무였다(신명기 21장 22-23절). 토빗이 목숨 걸고 시신을 매장한 것은 그 의무를 포로지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17 나흘 뒤, 산헤립이 죽었다.
아들들이 왕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18 그 아들들이 아라랏 산으로 도망치고, 다른 아들 에사르핫돈(Esarhaddon)이 왕이 되었다.
19 에사르핫돈이 왕이 되자, 토빗의 조카 아히카르(Ahiqar)가 왕의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아히카르가 왕에게 간청한 덕분에 토빗은 니네베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히카르는 고대 근동에서 유명한 지혜자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이름이 적힌 아람어 문서가 이집트 엘레판티네(Elephantine)에서 발굴되었다(기원전 5세기경 사본). 토빗기는 이 독립적 민담 인물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다음 장 — 잔치 자리에서 토빗이 다시 시신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날 밤 그가 치른 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