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3장 제비가 떨어진 달
하만
1 이 일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Agag) 사람 함므다다(Hammedatha)의 아들 하만(Haman)을 높여 그와 함께한 모든 방백 위에 앉혔다.
“아각 사람.” 두 단어가 에스더서 전체의 신학적 지층을 드러낸다. 아각은 아말렉 왕이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말렉을 진멸해야 했으나 아각을 살려두었고, 그 결정으로 왕위를 잃었다(사무엘상 15장). 그 아각의 후손이 지금 페르시아 제국의 이인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막아서는 자는 베냐민 지파, 기스의 후손 모르드개다 — 사울의 혈통과 같은 지파, 같은 가문이다. 사무엘상의 미완성 과제가 에스더서에서 다시 열린다.
2 왕의 모든 신하가 대문에서 하만에게 꿇어 절했다. 왕이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3 대문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물었다.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냐?”
4 날마다 그들이 말했으나 모르드개가 듣지 않았다. 모르드개가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그들이 하만에게 고하여 그 일을 보려 했다.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본문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단서만 준다.
우상 거부 해석: AD 1세기 요세푸스(Josephus) 의 『유대 고대사』 11권 6장은 페르시아에서 고관에게 절하는 의식이 신적 경배(προσκύνησις)의 성격을 띠었다고 본다. 그래서 모르드개의 거부는 십계명 1·2계명에 충실한 행위라는 독법. 칠십인역(LXX) 에스더 추가본(13장 12–14절)은 모르드개가 직접 “어떤 사람에게도 당신 외에는 절하지 않겠다”고 기도하는 장면을 더해 이 해석을 명문화한다.
민족적 원한 해석: 하만이 “아각 사람”(3장 1절)이라는 점이 단서다. 아각은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이 죽이지 못한 아말렉 왕이고, 출애굽기 17장 16절에서 여호와는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겠다고 맹세하셨다. 바벨론 탈무드 메길라 13a가 이 독법을 명시한다. 11세기 라쉬(Rashi) 와 13세기 이븐 에즈라(Ibn Ezra) 의 에스더 주석도 같다. 본문은 두 이유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5 하만이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꿇지도 절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분노로 가득 찼다.
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렸다.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 치는 것을 거절했다. 아하수에로의 나라 안에 있는 모르드개의 민족 곧 모든 유대인을 멸하려 했다.
부르
7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정월, 곧 니산(Nisan) 월에 어떤 날과 어떤 달이 좋은지를 알기 위해 하만 앞에서 부르(Pur), 곧 제비를 뽑았다. 제비가 십이월, 곧 아달(Adar) 월에 떨어졌다.
부르(פּוּר, Pur)는 히브리어가 아니다. 아카드어 ‘푸루(puru)‘에서 온 말로 ‘제비’나 ‘주사위’를 뜻한다. 본문 자체도 이 단어가 외래어임을 괄호로 설명한다(9:24 참조). 1934년 이라크 아슈르 발굴에서 BC 9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 주사위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푸루’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제비를 뽑아 길일을 결정하는 것은 고대 근동 전역의 관습이었다. 하만은 가장 길한 날을 신탁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날이 아달월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 날은 결국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날이 된다. 이것이 부림절의 이름 ‘부림(Purim)‘의 기원이다.
왕의 도장
8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의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다른 민족과 구별된 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들의 법률이 다른 모든 민족의 법률과 다르고,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으니, 그들을 그냥 두는 것이 왕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9 왕이 좋게 여기시면 그들을 멸하라는 조서를 내리시고, 저는 은 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들의 손에 드려 왕의 금고에 넣겠습니다.”
은 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제국의 연간 세수가 은 약 1만 4천 달란트였다. 하만이 제시한 액수는 제국 연간 수입의 3분의 2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하만이 어떤 방법으로 이 돈을 마련하려 했는지 — 몰수한 유대인 재산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10 왕이 자기 손의 반지를 빼서 유대인의 원수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었다.
11 왕이 하만에게 말했다.
“그 은을 네게 주니 그 백성도 함께 처리하라.”
12 정월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들이 불려와 하만이 명령하는 대로 왕의 각 지방 고관들과 각 민족의 방백들에게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조서를 썼다.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쳤다.
13 조서를 역마들로 보내 왕의 모든 지방에 전하게 했다. 십이월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에 모든 유대인 — 젊은이와 늙은이, 어린 아이와 여인 — 을 멸절하고 죽이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빼앗으라는 명령이었다.
멸절·죽임·진멸 — 세 동사가 겹친다. 본문은 의도적으로 언어를 쌓는다. 이 과잉 표현이 칙령의 잔혹함을 부각한다. 같은 세 동사가 8장의 반대 칙령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유대인이 원수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는 권리로 뒤집힌다.
14 각 지방에 포고문 사본이 법률로 공표되었다. 모든 민족이 그 날을 위해 준비하도록.
15 역마들이 왕명에 의해 급히 나갔다. 법령이 수산 궁성에도 반포되었다.
왕과 하만은 앉아서 술을 마셨다. 수산 성은 혼란에 빠졌다.
“왕과 하만은 앉아서 술을 마셨다. 수산 성은 혼란에 빠졌다.” 이 두 문장은 나란히 놓인다. 권력자의 안락함과 그 아래의 공포가 같은 호흡 안에 있다. 에스더서가 날카로운 이유다.
다음 장 — 모르드개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한다. 에스더에게 소식이 전해진다. 그리고 에스더는 결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