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3장 베 띠의 비유

유프라테스로 가라

1 야훼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베 띠를 사라. 네 허리에 두르라. 물에 담그지 마라.”

2 내가 야훼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둘렀다.

3 야훼의 말씀이 두 번째로 내게 임했다.

4 “네가 사서 허리에 두른 띠를 가지고 일어나라. 유프라테스(Euphrates)로 가서 그 강가 바위틈에 감추라.”

5 내가 가서 야훼가 내게 명령하신 대로 유프라테스강 가에 그것을 숨겼다.

6 오랜 날 뒤에 야훼가 내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유프라테스로 가서 내가 거기 감추라고 명한 띠를 꺼내라.”

7 내가 유프라테스로 가서 내가 감춘 곳을 파서 띠를 꺼냈다. 보라, 그 띠가 썩어 있었다. 아무 쓸모가 없었다.

유프라테스(פְּרָת, 페라트)를 두 번 왕복하는 행위 예언 — 이것은 실제 여정인가, 환상인가? 예루살렘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는 약 700킬로미터다. 왕복이면 1,400킬로미터. 학자들은 이것이 실제 여정이 아니라 환상 속의 행위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실제였다고 보기도 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몸을 예언의 도구로 사용한 예언자다 — 독신으로 살고(예레미야 16:2), 장례식에 가지 않고, 결혼 잔치에도 가지 않는다. 베 띠의 왕복이 실제였다면, 예레미야는 수년을 이 여행에 썼다. 그러나 그 비유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페라트(פְּרָת)” — 유프라테스의 히브리어 이름. 또한 일부 학자들은 “파라(Parah)“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아나돗 근처 약 6킬로미터에 있는 지명이다. 그렇다면 여정이 훨씬 짧다. 어느 쪽이든 의미는 같다. 바빌로니아를 상징하는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썩어버린 띠.


썩은 띠의 의미

8 야훼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

9 “야훼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처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썩게 할 것이다.

10 이 악한 백성, 내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으로 걷는 자들,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는 자들 — 그들이 이 띠처럼 될 것이다. 아무 쓸모없게 될 것이다.

11 띠가 사람의 허리에 달라붙듯이, 나는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이 내게 달라붙게 했다 — 그들이 내 백성이 되고, 이름이 되고, 찬양이 되고, 영광이 되게 하려고. 그런데 그들이 듣지 않았다.’”

베 띠 — 이집트 제사장들은 베 띠를 입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도 베로 만든 의복을 입었다. 베 띠는 종교적 맡음새, 거룩한 소속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물에 담그지 말라고 했다 — 씻지 말라. 그 상태로 바위틈에 숨겨두면 당연히 썩는다. 이스라엘이 야훼와 “접촉”을 잃어버린 것이 이와 같다. 야훼의 말씀의 물에 씻기지 않은 채, 세상의 바위틈에 숨어 있던 것이다.


포도주 단지

12 “이 말씀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단지에 포도주를 채워야 한다.’”

그들이 내게 말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단지에 포도주를 채워야 함을 알지 못합니까?”

13 그러면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야훼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다윗(David)의 보좌에 앉는 왕들을, 제사장들을, 예언자들을,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을 취하게 할 것이다.

14 내가 그들을 각자 그의 형제에 맞서, 아버지들과 아들들도 함께 부딪힐 것이다. 내가 자비도, 긍휼도 갖지 않겠다. 연민도 없이 그들을 파괴하겠다.”

야훼의 말씀이다.

포도주 단지 비유 — 이 비유는 충격을 통해 가르친다. 포도주 단지에 포도주를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 — 그렇다고 동의하게 한 다음, 그것이 심판의 비유임을 알려준다. 동의를 얻고 나서 판결을 내리는 예언 기법이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이 다윗에게 어린 양의 비유를 들려주는 방식과 같다. 포도주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예레미야 25:15-28)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 취하게 할 것이다. 판단력을 잃게 할 것이다.


교만하지 마라

15 들으라. 귀를 기울여라. 교만하지 마라. 야훼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16 어둠이 오기 전에, 네 발이 어두운 산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네 하나님 야훼께 영광을 돌려라. 너희가 빛을 기다리는 동안 그가 그것을 사망의 그늘로 만들고 빽빽한 어둠으로 바꾸기 전에.

17 너희가 듣지 않으면 내 영혼이 교만 때문에 은밀히 울겠다. 눈물로 심히 울겠다. 야훼의 양 떼가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에게

18 왕에게와 왕비에게 말하여라.

“겸손하게 앉으라. 너희의 화려한 면류관이 너희 머리에서 내려왔다.

19 네겝의 성읍들이 닫혔다. 열 자가 없다. 유다 전체가 포로로 잡혀갔다. 완전히 포로로 잡혀갔다.”

왕과 왕비 —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여호야긴(Jehoiachin · ㉸ 여호야킨) 왕과 그의 어머니 느후스다(Nehushta)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 1차 포로 때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잡혀갔다(열왕기하 24:15). 예레미야는 그것이 오기 전에 이것을 예언했다.


예루살렘의 수치

20 네 눈을 들어 북쪽에서 오는 자들을 보아라. 네게 주었던 양 떼는,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

21 네가 가르쳤던 자들을 그 위에 통치자로 세울 때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고통이 네를 붙잡지 않겠느냐? 해산하는 여자처럼?

22 네가 마음속으로 ‘왜 이런 일이 내게 임했는가?‘라고 말한다면 네 죄악의 많음 때문에 네 옷자락이 벗겨졌고 네 발꿈치가 폭력을 당했다.

23 에티오피아 사람이 그의 피부를 바꿀 수 있느냐? 표범이 그의 반점을 바꿀 수 있느냐? 그렇다면 너희도 악에 익숙한 자들로서 선을 행할 수 있겠느냐?

“에티오피아 사람이 그 피부를 바꿀 수 있느냐” — 이 구절은 피부색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오랜 습관이 바뀌지 않는다는 비유로 쓰였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인종차별적 함의가 없었다. 이것은 불변성의 비유다 — 본성처럼 굳어진 죄의 습관.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역설은 31장에서 온다 — 야훼가 새 마음을 주겠다는 것이다. 표범의 반점을 바꾸지 못하는 인간이 바꿀 수 없는 것을 야훼가 새 언약으로 바꾸신다.


바람에 흩어진 겨

24 “내가 그들을 광야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흩겠다.

25 이것이 네 몫이다. 내가 너에게 정한 분깃이다.”

야훼의 말씀이다.

“네가 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거짓에 의탁했기 때문이다.

26 그러므로 나도 너의 치마를 네 얼굴 위에 들겠다. 네 수치가 드러날 것이다.

27 네 간통과 네 울부짖음과 들판의 언덕 위에서의 네 음란한 몸부림과 네 역겨운 것들을 나는 보았다. 예루살렘아, 화가 있다. 얼마나 오래 지나야 네가 정결하겠느냐?”

1-13장을 통해 예레미야서의 첫 부분이 완성된다. 소명(1장)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배신(2-6장), 성전 설교(7장), 통곡(8-9장), 우상 풍자(10장), 언약의 파기(11장), 항변(12장), 베 띠(13장)까지 — 이것은 하나의 아치다. 소명받은 예언자가 배신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고하고, 그 안에서 자신도 함께 무너지는 아치. 그러나 1:10의 두 동사 — “세우고, 심기” — 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가리키고 있다. 31장의 새 언약이 그 쪽에 있다.

다음 장 — 기근의 예언. “우리 죄악이 우리에 맞서 증언합니다. 야훼여, 우리를 위해 행하소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