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장 이제 눈으로 봅니다
욥의 두 번째 응답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였다.
2 “주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사오며 주의 계획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나이다.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시기로 나는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였고 알 수 없고 놀라운 것들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주께 귀 기울이오니 주는 말씀하소서.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는 내게 알게 하소서.
5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만 들었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보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를 거두어들이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의 정점이다. “귀로만 들었으나 이제 눈으로 봅니다.” 이 한 문장이 욥기 전체의 전환점이다. 욥은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이 38-41장에서 질문들을 쏟아내셨다. 그 질문들은 욥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욥은 무언가를 보았다. 하나님의 현존 자체를 본 것이다. 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것이 변화의 내용이다.
“회개하나이다” — 이 번역이 논쟁적이다. 히브리어 원문 ‘나함(נָחַם)‘은 ‘위로받다’, ‘돌이키다’, ‘마음이 변하다’의 의미를 모두 가진다. 욥이 무엇을 회개하는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회개할 내용이 없다.
돌이킴 독법: 16세기 칼빈(Calvin · 욥기 강해) 과 17세기 청교도 매튜 헨리(Matthew Henry). 욥이 자신의 무지에서 돌이킨다.
위로 독법: 1985년 데일 패터릭(Dale Patrick) 의 분석과 이작 키스터(Yitzhaq Kister) 의 1996년 「욥의 회개에 관한 노트」. 전치사 ‘알(עַל)‘을 위로의 대상으로 읽어 “티끌과 재에 대해 위로받는다”로 옮긴다 — 곧 자기 처지를 받아들이고 위안을 얻는다는 뜻이다.
철회 독법: 데이비드 클라인스(David Clines · WBC 1989) 는 욥이 자신이 알지 못한 채 했던 항변의 언어 자체를 거두어들인다고 읽는다. 어느 독법이든,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만남의 응답이다.
야훼가 친구들에게 말씀하시다
7 여호와가 이 말씀들을 욥에게 하신 후에 여호와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에 대하여 나의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나의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나의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 내가 그를 받을 것이니 너희가 어리석은 것처럼 너희에게 갚지 않을 것이라. 이는 너희가 나에 대하여 나의 종 욥처럼 바르게 말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가 그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고 여호와가 욥을 받아들이셨다.
42:7의 판결이 욥기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옳게 말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욥은 옳게 말했다는 뜻이다. 욥의 항변 — “내 고난이 죄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해할 수 없게 행하신다”, “나는 죄 없다” — 이 하나님에 의해 옳다고 인정된다. 인과응보 신학이 잘못된 신학이라고 하나님이 직접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나 욥의 질문 — 왜 의인이 고난받는가 — 에 대한 답은 여기서도 주어지지 않는다. 욥은 이제 그 답을 받지 않고도 살아간다. 이것이 욥기가 ‘답 없는 응답의 신학’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욥의 회복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가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가 욥에게 이전 소유의 갑절을 주셨다.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과 이전에 알던 모든 자가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여호와가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었으며 각각 금 한 조각과 금 고리 하나씩을 그에게 주었다.
12 여호와가 욥의 후반 생애에 전반 생애보다 더 복을 주셨다.
그가 양 만 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와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 마리를 두게 되었으며
13 아들 일곱과 딸 셋도 두었는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Jemimah), 둘째 딸은 긋시아(Keziah · ㉸ 케찌아), 셋째 딸은 게렌합북(Keren-happuch · ㉸ 케렌 하푹)이라 이름 지었더라.
15 온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들이 없었으며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형제들과 같이 기업을 주었더라.
회복이 두 배다. 처음에 양 칠천이었으면(1:3) 이제는 만사천이다. 낙타 삼천이었으면 이제는 육천이다. 모든 것이 두 배다. 그러나 자녀는 다르다. 처음에도 열 명이었고(1:2), 이제도 열 명이다(42:13). 이것은 욥이 자녀 열 명을 잃고 자녀 열 명을 다시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확히는 그렇지 않다. 재산은 두 배가 되었지만 자녀는 같은 수다 — 왜냐하면 죽은 자녀 열 명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욥의 전체 자녀는 스무 명이 된 것이다. 두 배의 회복은 자녀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먼저 죽은 자녀들은 ‘대체’되지 않는다. 그 죽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이다.
딸의 이름이 기록된다. 아들들의 이름은 없다. 구약에서 딸의 이름이 명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 슬로브핫의 다섯 딸(민수기 27장), 야일의 딸 입다의 딸(사사기 11장), 등이 있다. 여미마는 비둘기, 긋시아는 계수나무(향료), 게렌합북은 검은 눈화장에 쓰이는 용기를 뜻한다. 세 이름 모두 아름다움과 향기와 관련된다. 욥의 딸들이 기업을 오빠들과 같이 받는 것도 이례적이다 — 고대 이스라엘에서 딸의 기업 수령은 아들이 없을 때에만 허용되었다(민수기 27장). 욥은 그 규범을 넘어섰다.
욥의 마지막 날들
16 이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늙어서 나이가 차게 되어 죽었다.
욥의 생애가 고난 이후 두 배로 연장된다. 고난 전 생애를 얼마로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일부 계산으로는 고난 이전에 칠십 년쯤 살았다면 이후 백사십 년을 더 산 셈이다. “늙어서 나이가 차게 되어 죽었다” — 아브라함(창세기 25:8), 이삭(창세기 35:29), 다윗(역대상 29:28)에게도 쓰인 표현이다. 좋은 죽음, 완전한 삶의 마감이다.
욥기는 답이 없는 책이다. 왜 고난이 왔는지 욥은 끝까지 듣지 못한다. 독자는 1-2장에서 그 배경을 안다. 욥은 모른다. 그러나 욥기의 결말이 이것을 말한다 — 욥의 항변이 더 옳았고, 친구들의 신학이 잘못이었으며, 욥은 하나님을 만났고, 두 번째 시작을 살았다. 이것이 욥기의 문학적 결론이다. 신학적 질문은 열려 있다. 의인의 고난이 왜 있는지 — 욥기는 그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야고보서 5:11 — “욥의 인내를 너희가 들었고.” 그러나 욥기의 욥은 인내보다 항변이 훨씬 많다. 욥은 시편 22편처럼 부르짖는다. 신약이 욥기를 ‘인내’로 단순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지만, 욥기 전체가 전달하는 욥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욥기의 욥은 인내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한 자다. 야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