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복음서 9장 첫 성전 청결과 한밤의 손님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1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졌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돈 바꾸는 자들이 상을 차리고 앉아 있었다.

3 예수가 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엎으셨다.

4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5 제자들은 한 구절을 떠올렸다.

“주의 전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시편 69:9)

유월절 전후 성전 뜰은 시장이었다. 디아스포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자국 화폐를 성전세로 쓰는 두로의 세겔로 바꾸어야 했고, 제사용 짐승은 흠 없는 것을 사야 했다. 이 모든 거래에는 수수료가 붙었다. 1세기 후반 미슈나(Keritot 1:7)는 비둘기 한 쌍의 가격이 한때 황금 디나르까지 치솟았다고 기록한다. 가난한 이들이 정결 예식을 위해 비둘기 한 쌍을 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수의 분노는 이 구체적 부정의에 닿아 있었다.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6 유대인들이 예수께 도전했다.

“이런 일을 하다니, 당신이 어떤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7 예수가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8 유대인들이 비웃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9 그러나 예수가 말씀하신 성전은 자기 몸이었다.

10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날의 말씀을 다시 떠올렸다. 성경과 예수가 하신 말씀을 함께 믿었다.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은 성전 청결을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기록한다. 요한복음은 사역 초반에 배치한다. 두 사건설은 16세기 종교개혁 주석가 요한 칼뱅, 17세기 존 라이트풋 이래 보수 진영의 표준이었다. 현대에서 D.A. 카슨(『요한복음 주석』 1991), 레온 모리스가 같은 입장을 잇는다. 두 번 성전을 비웠다는 것이다.

신학적 재배치설루돌프 불트만(『요한복음』 1941)과 C.H. 도드(『네 번째 복음서의 해석』 1953)가 정식화했다. 한 사건의 신학적 재배치라는 입장이다. 요한이 성전 대체 모티프를 사역 초반에 두어 복음서 전체의 해석학적 열쇠로 삼았다는 독법이다. C.K. 바렛(『요한복음 주석』 1955, 1978 개정)이 같은 노선이다. 레이먼드 브라운(앵커 바이블 1966)은 절충안 — 한 사건이지만 요한이 자료적 자유에 의해 옮겨놓았다고 본다.

이 통합본은 두 사건설을 따랐다. 요한이 기록한 사역 초반의 성전 청결을 9장에 두고, 공관복음의 마지막 주간 성전 청결은 후반부의 해당 위치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11 예수가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

12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13 그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가 증언해 줄 필요가 없으셨다.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 알고 계셨다.


밤에 찾아온 손님

14 바리새파 사람으로 니고데모(Nicodemus · ㉸ 니코데모)라는 이름의 유대인 지도자가 있었다.

15 그가 밤에 예수께 왔다.

“랍비,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인 줄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 표적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16 예수가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첫째, 바리새파 지도자로서 공개적으로 오기 어려웠다. 둘째, 요한복음에서 ‘밤’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 1:5의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와 연결되는 상징이다. 니고데모는 어둠 쪽에서 빛 쪽으로 발을 떼고 있다.

17 니고데모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18 예수가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19 육체로 난 것은 육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20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21 바람은 제가 원하는 데로 분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이와 같다.”

‘바람’과 ‘영’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다 — 프뉴마(πνεῦμα). 히브리어에서도 같다 — 루아흐(רוח). 바람을 보일 수 없듯, 성령의 역사를 설명의 틀에 가두기 어렵다. 예수는 정의하지 않고 비유한다. 니고데모는 율법의 정밀한 해석에 평생을 바쳐 온 사람이다. 그 앞에 정의되지 않는 것이 놓인다.

22 니고데모가 물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23 예수가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을 모르느냐?

24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런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25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26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없다.

2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인자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28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민수기 21장 —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 갈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라. 물린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면 살 것이다.” 예수가 그 이미지를 자기에게 적용한다. ‘들어 올려진다’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하늘로 높여지는 것을 동시에 가리키는 이중 언어다(요 8:28, 12:3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2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30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을 통해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31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32 심판은 이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들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이다.

33 악을 행하는 사람마다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34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드러나도록.

3:16의 헬라어 원문은 ‘아가페’를 사용한다.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다. “이처럼(후토스)“은 방식과 정도 둘 다를 가리킨다.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 독생자를 내어 주는 방식으로.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 그렇게까지. 이 한 절이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고데모는 누가복음에도 마가복음에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마태복음에도 없다. 요한 고유 자료다. 학자들의 표준 표기법으로는 J자료(Johannine source)에 해당한다. 누가복음 고유 자료를 L, 마태복음 고유 자료를 M으로 부르는 것과 평행한다. 니고데모는 7:50에서 산헤드린 회의에서 예수를 변호하고, 19:39에서 시신을 거두러 다시 등장한다. 한밤중 손님으로 시작해 무덤가까지 따라간 사람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35 그 뒤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땅으로 가셨다. 거기 머물며 세례를 주셨다.

36 요한도 살림(Salim) 근처 애논(Aenon)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거기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

37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38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정결 예식을 두고 어떤 유대인과 논쟁이 일었다.

39 그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했다.

“랍비, 요단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 선생님이 증언하신 그분 — 을 보십시오.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다 그분께로 갑니다.”

40 요한이 대답했다.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41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보내진 사람이라고 내가 직접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들었다.

42 신부를 얻는 것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거기 서서 신랑의 목소리를 들을 뿐인데, 그 목소리에 크게 기뻐한다. 이제 내 기쁨이 이렇게 가득 찼다.

43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한의 이 마지막 증언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선 사람의 고백이다. 그는 자기 역할을 정확히 알았다. 혼례에서 중매하고, 신랑을 이끌어 신부에게 데려다주고, 물러나는 것. 그것이 전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곧 그는 마케루스 요새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44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의 것을 말한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45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는데, 아무도 그 증언을 받지 않는다.

46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 손에 맡기셨다.

47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문다.

이 장은 요한 2:13-25, 요한 3:1-21, 요한 3:22-36을 통합했다. 모두 요한 고유 자료다. 공관복음서는 사역 초반의 예루살렘 방문도, 니고데모 대화도, 요한의 마지막 증언도 기록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서의 시간표에서 예수는 사역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내다가 마지막 한 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요한복음은 그 사이에 여러 차례의 예루살렘 방문을 끼워 넣는다. 어느 쪽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지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없다. 다만 요한이 보존한 자료가 공관복음서가 단순화한 시간표를 보충한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다.

다음 장 —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지난다. 정오의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