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복음서 21장 종려나무 가지와 베다니의 향유

베다니의 잔치

1 유월절 엿새 전, 예수가 베다니(Bethany · ㉸ 베타니아)로 가셨다. 나사로(Lazarus · ㉸ 라자로)가 있는 곳,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사람의 마을이었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마르다(Martha · ㉸ 마르타)는 시중을 들었고, 나사로는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3 잔치 자리는 나병(leprosy · ㉸ 한센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이었다.

4 마리아(Mary)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근(약 326g)을 가져와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또 그 발에 부은 뒤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의 발을 닦았다. 향유 냄새가 집 안에 가득했다.

5 제자 가운데 어떤 자들이 분노하여 서로 말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이렇게 허비하느냐.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6 가룟 유다(Judas Iscariot · ㉸ 유다 이스카리옷)가 그렇게 말했다. 그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도둑이었다. 돈 궤를 맡고 있으면서 그 안에 든 것을 훔쳐 갔다.

7 예수가 말씀하셨다.

“그녀를 가만두라. 어찌하여 그녀를 괴롭히느냐. 그녀가 내게 한 일은 좋은 일이다.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가 원할 때마다 그들에게 잘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9 그녀가 자기 힘껏 했다. 내 장례를 위해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

1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 온 세상 어디서든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녀가 한 일도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함께 이야기될 것이다.”

향유 — 마태와 마가는 머리에 부었다고 적고, 요한은 발에 부었다고 적는다. 한 여인이 머리에서 발까지 부었다고 보는 조화 시도가 있고, 별개 사건의 두 보고로 보는 시도가 있다. R.T. 프랜스(『매튜 NICNT』 2007)와 D.A. 카슨은 같은 사건의 다른 강조로 본다. 1세기 잔치 기록에서 머리에 부은 기름은 환영의 표시였고, 발에 부은 기름은 극단적 헌신과 종 됨의 자세였다. 마리아의 행동이 양쪽을 모두 갖추었다는 본문 통합이 가능하다.

베다니 향유와 누가 7:36-50의 향유 — 누가에는 갈릴리에서 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어떤 “죄인 여인”이 들어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는 사건이 있다. 같은 사건인지, 같은 여인인지가 해석사의 큰 주제다. 6세기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591년 설교에서 누가의 죄인 여인 = 베다니의 마리아 = 막달라 마리아의 동일 인물설을 정식화했고, 1969년 가톨릭 전례 개혁(Calendarium Romanum) 전까지 서방 전례에서 이 동일성이 표준이었다. 4세기 이래 동방교회는 이미 별개 인물로 보았다. 현대 가톨릭과 개신교 학자 다수는 별개 사건·별개 인물설을 받아들인다 — 누가의 향유 사건은 갈릴리에서 일어난 다른 사건이고, 베다니의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와도 다른 인물이라는 것. 레이먼드 브라운(『요한복음』 1966)과 크레이그 키너(『요한복음 주해』 2003)가 이 분리 입장의 대표 학자다.

삼백 데나리온 — 1세기 일용직 일급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일 년 노동 임금에 가까운 액수다. 순수한 나드(피스티코스 — πιστικός)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의 Nardostachys jatamansi 식물 뿌리에서 추출한 향유로, 로마 제국에서 가장 비싼 향유 가운데 하나로 거래됐다. 대 플리니우스 『박물지』 12:42에 같은 향유의 가격이 기록되어 있다. 옥합(알라바스트론)은 이집트산 설화 석고로 만든 작은 병으로, 한 번 깨뜨려야 향유를 부을 수 있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행위는 일회성·전부의 헌신을 의미했다.


나귀를 끌어오라

11 다음 날,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워졌다. 감람산(Mount of Olives · ㉸ 올리브산) 기슭의 벳바게(Bethphage · ㉸ 벳파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가 두 제자를 보내며 말씀하셨다.

12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라. 들어가면 곧 사람이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어린 나귀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 어미와 함께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

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더라’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내줄 것이다.”

14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났다.

15 그들이 어린 나귀를 풀 때 그 임자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어린 나귀를 푸느냐.”

16 “주께서 쓰시겠다 합니다.”

17 그들이 어린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으니 예수가 그 위에 타셨다.

18 큰 무리가 자기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자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깔았다. 명절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마중 나갔다.

19 그가 가실 때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윗(David)의 자손이여, 복이 있다.

20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복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21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떠들썩하여 말했다.

“이 사람이 누구냐.”

22 무리가 말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다.”

호산나(הוֹשִׁיעָה־נָּא, 호샤 나) — 시편 118:25 “주여, 구원하소서”의 직접 인용. 본래 간청이었던 단어가 시간이 흐르며 환호로 굳어졌다. “구원하소서”가 “구원하신 이를 찬양합니다”가 됐다. 1세기 유월절 순례에서 이 시편 118편(이스라엘 사람이 대명절 때마다 부르는 할렐(הַלֵּל) 시편의 마지막)이 정식으로 불렸다. 군중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외친 것은 같은 시편 26절을 그대로 끌어온 것이다. 군중은 그 본문이 한 사람의 이름과 결합되리라고는 알지 못한 채 외쳤다.

어린 나귀와 스가랴 9:9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르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곧 나귀의 새끼인 어린 나귀니라.” 정복하는 왕은 군마(수스 — סוּס)를 탔다. 평화의 왕은 나귀(하모르 — חֲמוֹר)를 탔다. 1세기 유대 메시아 기대 다수가 군사적 해방자였기에 나귀 타고 들어오는 모습은 의도적인 통념 거부였다. 마태는 어미와 어린 나귀 둘을 다 적고 다른 셋은 어린 나귀만 적는다. 마태의 표현은 스가랴 9:9의 히브리 평행법을 그리스어 본문에서 두 짐승으로 풀어 옮긴 결과로 학자들은 본다.


무화과나무

23 다음 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날 때 예수가 시장하셨다.

24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다. 가까이 가 보시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5 예수가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이 들었다.

마가는 무화과 저주(11:12-14)와 다음 날 그것이 마른 것을 본 일(11:20-21)을 두 부분으로 분리해 적고, 그 사이에 성전 청결 사건을 둔다. 마태는 같은 일을 한 사건으로 압축해 입성 다음 날 한꺼번에 일어난 것으로 적는다(21:18-22). 마가의 분리 구조는 마가의 특징적 샌드위치 기법(인터칼레이션)이다 — 한 사건을 두 부분으로 가르고 그 사이에 다른 사건을 끼워 두 사건이 서로를 해석하게 만든다. 무화과 저주가 성전 청결과 짝을 이루어 —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 외형은 있으나 본질이 없는 성전 — 하나의 행위 예언이 된다. 1세기 봄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기 전에 작은 초기 열매(파게 — פַגֵּי)가 먼저 열리는 일이 있다. 마가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고 적은 것은 따라서 모순이 아니다. 잎이 났다면 그 초기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기대였다.


성전을 비우심

26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 들어가셨다.

27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사는 자들을 다 내쫓으셨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28 누구든 그릇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29 가르쳐 말씀하셨다.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들의 굴혈로 만들었다.”

3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모의했다. 무리가 다 그 가르치심을 놀라워했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다.

31 성전 뜰에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가 그들을 고치셨다.

3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과, 성전 뜰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들을 보고 분개했다.

33 “이 아이들이 무엇이라 하는지 들으십니까.”

34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찬양이 온전케 하셨도다’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35 저녁이 되자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나가 베다니로 가셨다.

성전 청결의 두 시점 문제 — 요한복음은 같은 사건을 예수 사역의 시작에 둔다(요한 2:13-22). 공관복음은 마지막 주간에 둔다. 두 사건설(요한 2장과 마가 11장이 별개의 두 청결)은 19세기 보수 진영 학자(루이스 모리스 등)가 옹호했고, 한 사건설(요한이 신학적 의도로 시점을 옮겼다)이 현대 학자 다수의 입장이다. C.K. 바렛(『요한복음』 1955)과 레이먼드 브라운(『요한복음』 1966)이 후자의 대표다. 본 통합복음서는 마가-마태의 마지막 주간 시점을 따랐다. 요한이 시점을 옮긴 의도는 자기 복음서의 신학 구조 — 새 성전이신 예수 — 를 첫 표적의 자리에 배치한 것으로 본다.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굴혈” —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의 결합이다. 이사야 56:7은 “이방인도 구별 없이 받아들이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약속한다. 1세기 헤롯 성전은 가장 바깥 뜰만 이방인에게 열렸고 그 안쪽 안마당부터는 이방인 출입이 사형으로 금지됐다. 예수가 환전상과 비둘기 장사를 내쫓은 자리가 바로 그 이방인의 뜰이었다. 곧 만민이 기도해야 할 자리가 시장이 되어 있었다. 본문 내적 충돌이 정확히 그 자리에서 터졌다.


권위에 대한 질문

36 다음 날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무화과나무 곁을 지날 때 그 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37 베드로가 기억하여 말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38 예수가 대답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 누구든지 이 산에게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그 말한 것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3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될 것이다.

40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누구에게든지 무엇이든 마음에 거리낌이 있거든 용서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41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가 성전에서 거니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와서 물었다.

42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43 예수가 대답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겠다.

4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45 그들이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4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무리를 두려워한다. 모든 무리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긴다.”

47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

48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않겠다.”

이 장은 마태 21:1-27, 26:6-13 / 마가 11:1-33, 14:3-9 / 누가 19:28-48 / 요한 12:1-19를 통합했다. 입성과 성전 청결은 4복음서 모두 기록한 드문 경우다. 베다니 향유는 마태·마가·요한이 기록하고 누가는 다른 사건(7:36-50)을 다른 시점에 적는다. 무화과 저주는 마태와 마가에 있고 누가에는 없다 — 누가는 13:6-9에서 같은 의미의 무화과 비유를 평화롭게 변형했다. 4복음서가 같은 한 주간을 다루면서도 강조와 시점이 다르게 짜인다. 마가가 한 주간을 가장 자세히 그리고(11–16장), 마태가 그것을 따르면서 강화 묶음을 추가하고, 누가가 자기 시각의 비유와 도시 통곡을 보탠다. 요한은 같은 한 주간을 11–19장이라는 가장 긴 분량으로 짠다.

통합복음서의 첫 절기를 위한 이 21장으로, 우리는 십자가 길의 입구에 섰다. 다음 장(통합복음서의 다음 권)에서 예수는 감람산에서 성전 멸망과 종말을 가르치시고, 한 다락방에서 빵을 떼시고, 겟세마네에서 무릎을 꿇으신다.

다음 장 — 감람산의 어두운 강화. 그리고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묻는다. “너도 이 사람과 함께 있지 않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