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복음서 19장 라자로

베다니의 기별

1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 베다니(Bethany · ㉸ 베타니아)나사로(Lazarus · ㉸ 라자로)였다.

2 그의 누이 마리아(Mary)마르다(Martha · ㉸ 마르타)가 사는 마을이었다.

3 마리아는 주께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그의 발을 닦은 그 여인이다. 병든 자는 그녀의 오라비 나사로였다.

4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 예수께 알렸다.

“주여, 보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5 예수가 듣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려는 것이다.”

6 예수는 마르다와 그 누이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7 나사로의 병을 들으시고도 머무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계셨다.

베다니 — 예루살렘 동쪽 약 3km, 감람산 동남쪽 기슭. 현대 알아자리예(Al-Eizariya, 아랍어 — “라자로의 마을”). 6세기 비잔틴 시대 기록에 이미 라자로 무덤 순례지로 등장한다. 4세기 에우세비우스의 『지명사전』(Onomasticon)도 이곳을 명시한다. 1세기 베다니는 예루살렘 외곽 작은 마을이었고 예수가 마지막 주간 동안 매일 밤 묵으셨던 곳이다(마가 11:11).

왜 이틀 더 — 본문이 명시적으로 풀지 않는다. 1세기 유대 전통에서 영혼이 사흘까지는 몸 곁을 맴돈다고 믿었다(레위기 라바 18:1). 나흘은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죽음의 확정이었다. 39절에서 마르다가 “지금쯤은 냄새가 납니다. 나흘이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시간 자체가 표적의 일부가 됐다.


다시 유대로

8 그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유대로 가자.”

9 제자들이 말했다.

“랍비여, 방금 유대인들이 주를 돌로 치려 했는데 또 거기로 가시겠습니까?”

10 예수가 대답하셨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1 그러나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안에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2 그러고 나서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그를 깨우러 간다.”

13 제자들이 말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나을 것입니다.”

14 예수가 그의 죽음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으나, 제자들은 잠자는 일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알았다.

15 그제야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사로가 죽었다.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너희를 위해 기뻐한다. 너희로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16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Thomas · ㉸ 토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함께 가서 죽자.”

디두모(Δίδυμος — “쌍둥이”)는 도마의 별명. 아람어 테오마(תְּאוֹמָא)도 같은 뜻이다. 도마가 누구의 쌍둥이인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다. 후대 외경 도마행전(2세기)은 그를 예수의 쌍둥이로 그리지만 정경 본문 안에는 그런 암시가 없다. 도마는 요한복음에서 세 번 결정적으로 등장한다 — 여기서, “주여, 어디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니”의 14:5에서, 그리고 부활 후 “내가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의 20:25에서.


마르다의 고백

17 예수가 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다.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약 십오 스타디온(약 2.8km) 정도였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와서 그 오라비의 일로 위로하고 있었다.

20 마르다는 예수가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았다.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말했다.

“주여, 주가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지금이라도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압니다.”

23 예수가 말씀하셨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24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 압니다.”

25 예수가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마르다가 대답했다.

“주여,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요한복음의 일곱 “에고 에이미” 가운데 다섯째다. 마르다는 부활을 종말의 미래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24절). 예수는 그 미래를 자기 인격으로 가져온다. “나는 부활이다” — 부활이 시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선언이다. 마르다의 응답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베드로 고백과 같은 무게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예수가 우시다

28 이 말을 한 뒤에 마르다가 가만히 가서 자기 누이 마리아를 부르고 말했다.

“선생이 오셨다. 너를 부르신다.”

29 마리아가 듣고 빨리 일어나 예수께로 갔다.

30 예수는 아직 마을에 들어오지 않으시고 마르다가 맞이한 곳에 계셨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이 마리아가 빨리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왔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고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주가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3 예수가 그녀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며 괴로워하셨다.

34 “그를 어디 두었느냐.”

“주여, 와서 보소서.”

35 예수가 우셨다.

36 유대인들이 말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37 그 가운데 어떤 자들이 말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예수가 우셨다(에다크뤼센 호 예수스).” 헬라어 원문 두 단어. 신약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본문은 우심의 이유를 풀이하지 않는다. 33절의 “비통히 여기시며”로 옮긴 단어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는 본래 말이 콧김을 내쉬는 모습을 가리키는 강한 분노 표현이다. 슬픔만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향한 분노가 있다고 학자들은 본다. 4세기 어거스틴(『요한복음 강해』 49)은 예수의 눈물을 인성의 증거로, 무덤을 부르신 것을 신성의 증거로 짝지었다.


나사로야, 나오라

38 예수가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굴이고 그 앞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가 말씀하셨다.

“돌을 옮기라.”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말했다.

“주여, 지금쯤은 냄새가 납니다. 나흘이 되었습니다.”

40 예수가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했다.”

41 그들이 돌을 옮겼다.

예수가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42 항상 들어 주시는 줄 내가 알았습니다. 그러나 둘러선 무리를 위해 말씀드린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그들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44 죽었던 자가 나왔다. 손과 발은 베로 동였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였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풀어 다니게 하라.”

1세기 유대 무덤 — 예루살렘 일대의 부유층은 굴식 무덤(kokhim)을 썼다. 굴 안에 시체를 안치할 수 있는 좁은 굴 여러 개가 옆으로 뚫려 있고, 입구는 둥근 돌(골랄)로 막았다. 시체는 기름과 향료를 발라 베로 감았다. 1세기 시몬 벤 고시(Simon ben Goshi)의 무덤(예루살렘 키드론 골짜기)에서 같은 양식의 굴이 출토됐다. 이 비유적 말씀이 아니라 1세기 매장 관습의 사실적 묘사다.


가야바의 예언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가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다.

46 그러나 가운데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알렸다.

47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할까.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만일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다.

48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다.”

49 그 가운데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Caiaphas · ㉸ 카야파)가 말했다.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않는다.”

51 이는 자기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예수가 민족을 위해 죽을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52 또 그 민족만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53 그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54 그래서 예수가 더 이상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거기를 떠나 광야에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Ephraim · ㉸ 에프라임)이라 불리는 마을에 들어가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다.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 안에 서서 서로 말했다.

“너희 생각에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않겠느냐.”

57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 예수가 있는 곳을 알면 신고해 잡게 하라고 명령을 내려두었다.

가야바(Caiaphas) — 1세기 유대 대제사장 가족 가운데 안나스 가문의 사위. AD 18–36년 재임. 안나스가 실권자였고 가야바가 명목상 대제사장이었다. 1990년 예루살렘 평화의 숲에서 한 가족 무덤의 납골함이 발견됐는데, 한 함에 “요세푸스 바르 카야파”가 새겨져 있어 이 가야바 가문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가야바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발언은 정치 계산에서 나온 말이지만, 요한은 그것이 의도와 별개로 예언이 됐다고 적는다. 51절은 요한의 편집자 주다.

나사로 사건이 공관복음에 없다 — 학자들의 해석. 18세기 독일 이신론자 헤르만 라이마루스(H.S. Reimarus, 1694-1768)의 1778년 단편 출간 이후로 이 침묵이 의심의 근거가 됐다.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Strauss)의 1835년 『예수의 생애』가 신화 가설을 정식화했고, 20세기 루돌프 불트만(『요한복음 주석』 1941)이 신학적 창작설을 발전시켰다. 반대편에서 영국의 C.H. 다드(『제4복음서의 역사적 전통』 1953)와 미국의 레이먼드 브라운(『요한복음 주석』 1966)이 역사적 핵을 옹호했다 —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 직전 결정적 계기였기에 공관복음의 다른 시점 강조와 마찰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누가 10:38-42의 마르다·마리아 자매가 베다니에 살았다는 정보가 누가에게도 있었다는 점이 옹호 근거다.

마리아·마르다·라자로의 정체 — 누가 10:38-42의 마르다와 마리아가 베다니의 동일 가족이라는 점은 학자 다수가 인정한다. 다만 누가가 “어떤 마을”이라고만 하고 베다니라는 지명을 적지 않았다. 다음 장(통합복음서 21장)에서 다룰 베다니 향유 사건의 마리아가 같은 마리아인지, 그리고 누가 7장의 “죄인 여인”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동일 인물설은 6세기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591년 설교에서 정식화됐고, 1969년 가톨릭 전례 개혁 전까지 서방에서 표준이었다. 현대 학자 다수는 누가 7장은 다른 사건과 다른 여인으로 본다. 동일성은 추후 21장에서 본격 다룬다.

이 장은 요한 11:1-57을 풀어 썼다. 공관복음에 평행이 없다. 본 통합복음서에서 한 장 전체가 한 복음서의 한 장과 평행하는 드문 경우다. 요한복음 안에서 나사로 부활은 일곱 표적의 마지막이고 책 전체의 신학적 절정이다. 이 표적이 가야바 모의를 결정짓고 예수의 죽음을 직접 부른다 — 표적이 죽음을 부르는 역설이 요한 신학의 골격이다.

다음 장 — 예수가 베레아를 거쳐 다시 예루살렘 길로 들어선다. 부자 청년이 무릎을 꿇는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리를 청한다. 여리고 길에서 한 맹인이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