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0장 열다섯 해와 바벨론의 사신
죽음 앞에서
1 그 무렵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됐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와서 말했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집에 유언하십시오. 당신이 죽을 것입니다. 살지 못할 것입니다.”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돌리고 여호와께 기도했다.
3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하게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며 당신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했다.
히스기야의 반응은 체념이 아니었다. 선고를 받은 그 자리에서 즉각 기도했다. 얼굴을 벽으로 돌린 것은 아마도 마주 대하는 방문객들에게서 몸을 돌려 홀로 있으려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세운 것은 자기 의로움이었다 — “내가 진실하게 행했습니다.” 다윗처럼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근거로 내세웠다. 하나님이 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은, 기도의 형식보다 간절함이 닿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이사야가 아직 중간 뜰을 나가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5 “돌아가서 내 백성의 지도자 히스기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 네 눈물을 보았다. 내가 너를 낫게 하겠다. 사흘째 되는 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갈 것이다.
6 내가 네 날들에 열다섯 해를 더하겠다. 앗수르 왕의 손에서 이 성을 구원하겠다. 나를 위하고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겠다.”
7 이사야가 말했다.
“무화과 과자를 가져다가 종기에 붙이면 나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져다 종기에 붙였다. 왕이 나았다.
“무화과 과자를 붙이라”는 처방은 고대 근동 의학에서 실제로 사용된 방법이다. 메소포타미아 의학 문헌에도 비슷한 처방이 등장한다. 기적과 의료 처방이 나란히 나온다. 열왕기 저자는 이 둘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연적 수단을 통해 일하신다는 관점이다.
해 그림자의 징조
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물었다.
“여호와가 나를 낫게 하실 것과 사흘째에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갈 것을 확인하는 징조가 무엇입니까?”
9 이사야가 말했다.
“여호와가 주시는 징조가 이것입니다. 해 그림자가 아하스(Ahaz)의 해시계에서 앞으로 열 칸을 나아갔다 하시겠습니까, 혹은 뒤로 열 칸을 물러가겠습니까?”
10 히스기야가 대답했다.
“해 그림자가 열 칸 나아가기는 쉽습니다. 뒤로 열 칸 물러가게 하십시오.”
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했다. 여호와가 아하스의 해시계에서 이미 나아간 해 그림자를 열 칸 물러가게 하셨다.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간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오랜 논쟁 주제였다. 글자 그대로의 기적인가, 아니면 지역적 대기 굴절 현상인가. 본문은 설명하지 않는다. 히스기야가 “나아가기보다 물러가는 것”을 선택한 이유도 명시되지 않는다. 다만 이 징조의 방향이 — 거꾸로 가는 것 — 히스기야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다. 죽음 선고를 받았으나 삶으로 돌아간다. 끝났다고 생각한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
바벨론의 사신
12 그때 바빌론(Babylon) 왕 발라단의 아들 므로닥발라단(Merodach-baladan)이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냈다.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3 히스기야가 그들을 환영했다. 그의 모든 보물 창고, 은과 금과 향료와 좋은 기름, 무기 창고와 자기 보물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였다. 히스기야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집과 온 왕국에서.
14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물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그들이 어디서 왕에게 왔습니까?”
히스기야가 말했다.
“그들이 먼 나라 바빌론에서 왔습니다.”
15 “그들이 당신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내 보물 창고에 내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6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말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17 보십시오. 날이 올 것입니다. 당신의 집에 있는 것과 당신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빌론으로 옮겨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말씀하셨습니다.
18 당신에게서 날 자들, 당신이 낳을 아들들이 바빌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히스기야 이후 약 100년 뒤에 성취된다. BC 597년과 587년 바빌론 포로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히스기야가 자초했다는 점이다. 바빌론 사신에게 모든 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빌미가 됐다. 이사야서 39장이 이 사건의 평행 기록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그 행동을 지적했다.
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말했다.
“당신이 전한 여호와의 말씀이 선합니다.”
그는 또 말했다.
“내 생전에는 평화와 진실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히스기야의 반응은 씁쓸하다. “내 생전에만 괜찮으면 된다”는 것으로 읽힌다. 자기 후손들의 운명보다 자기 시대의 평화를 더 소중히 여겼다. 개인적으로는 경건한 왕이었으나, 왕으로서의 책임감이 미래 세대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열왕기 저자는 이 반응을 기록하면서 판단을 유보한다. 독자가 판단하게 한다.
히스기야의 마무리
20 히스기야의 나머지 일들과 그의 모든 업적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것은 유다 왕들의 역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21 히스기야가 죽어 조상들과 함께 자니 그의 아들 므낫세(Manasseh · ㉸ 므나쎄)가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못과 수도를 만들어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것” — 이것이 히스기야 터널(Hezekiah’s Tunnel)이다. 예루살렘 남쪽 실로암 못(Pool of Siloam)으로 이어지는 533미터 지하 수로다. 1880년 실로암 못에서 놀던 소년이 내부 비문을 발견했다. 1909년 아일랜드 외교관이자 고고학자 클로드 클레르몽-가노(Claude Conder-Ganneau)가 비문을 해독했다. 비문은 양쪽에서 굴착한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 “곡괭이질 소리가 들렸다, 세 규빗이 남았다, 서로 목소리가 닿았다.” 3000년 전 인부들의 경험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이 터널은 산헤립의 포위를 대비한 히스기야의 수자원 확보 공사였다(역대하 32:30).
다음 장 — 므낫세가 왕이 된다. 히스기야가 평생 쌓은 것들이 하나씩 무너진다. 성경은 므낫세를 유다 왕 중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