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장 죄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삶
6장은 5:20-21에서 등장한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선언이 불러올 수 있는 오해를 정면으로 다룬다. 신학의 역사에서 이 오해는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은혜 아래 있으므로 율법의 도덕 요구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주장. 바울은 세례 신학으로 답한다.
은혜 아래 있으면 더 죄를 지어도 되는가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로 죽었을 때에 무덤에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6:10 “단번에” — 헬라어 ἐφάπαξ(에파팍스). 한 번으로 완결되어 반복 불필요. 히브리서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다(히 9:12, 10:10). 레위기 제사는 매년 반복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 번, 완결적이다. 이 “단번에”가 로마서 6장 전체 논리의 힘이다 — 그리스도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고, 신자도 세례에서 그 죽음에 단번에 참여했다.
세례 — 바울의 세례 신학이 가장 집중되는 구절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행위다. 물 안에 잠기는 것(카타푸티제인)은 죽음이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이다. 초기 교회의 침례 관행은 이 신학을 의식(儀式)으로 구현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감각이나 유혹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법적 신분의 변화를 말한다 — 죄가 우리를 주관하는 힘이 깨졌다. 바울은 이것을 “여길지어다”(로기제스테)라는 동사로 표현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실재다.
6:3-5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동사는 모두 과거 시제(aorist)다. 세례로 함께 장사되었다, 연합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래도 있다 —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5절). 이미 일어난 것(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최종 부활) 사이에서 신자는 산다. 이 긴장이 그리스도인의 현재 삶이다.
의의 종이 되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 너희가 그것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6:19-22의 논리 — 바울은 같은 “종” 언어를 두 상태에 적용한다. 과거: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름. 현재: 지체를 의에 내주어 거룩함에 이름. 방향이 반전되었을 뿐, 구조는 같다. “종”이라는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 섬기는 주인이 바뀌었다. 자유는 어떤 주인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올바른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6:23 —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 한 문장은 로마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다. “삯”(옵소니아)은 군인의 급료를 뜻하는 단어다. 죄를 섬긴 대가로 받는 것이 사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조 —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 삯(받아야 마땅한 것)과 은사(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주어지는 것)의 대비가 핵심이다.
6장 전체는 5:20-21에서 제기될 수 있는 오해 — “죄가 많을수록 은혜가 넘치니 더 죄지어도 좋다” — 에 대한 논박이다. 바울의 답은 법적 논거가 아니라 존재론적 논거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자는 죄에 대해 죽었다. 죽은 자는 지배를 받지 않는다.
6:16-22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종”(둘로스) 은유는 당시 로마 세계에서 노예제도가 일상이었다는 배경을 전제한다. 자유인이 아닌 종의 개념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오늘날 독자에게 낯설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요점은 중립 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 죄의 종이거나 의의 종이거나. “자유”는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올바른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