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장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

10장은 9장의 신학(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서 인간의 책임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 실패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방향 선택이었다. 주권과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로마서 9-11장 전체가 씨름하는 문제다.

이스라엘을 향한 소원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0장은 9장에서 이스라엘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초한 다음, 그 현실적 원인을 분석한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다(2절). 지식이 없어서도 아니다(18-21절). 자기 의를 세우려 한 것이 문제였다(3절). 신학적 오류가 아니라 방향의 오류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믿음의 의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이는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이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9-10 —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이 두 동작은 구원 고백의 구조다. 기독교 세계에서 세례 서약, 회심 고백, 신조 낭독의 형식적 뿌리가 여기에 있다.

10:13 — 요엘 2:32 인용.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요엘에서 “주”는 야웨(여호와)다. 바울이 이것을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은, 예수와 야웨를 동일시하는 매우 이른 기독론의 흔적이다.


듣지 못한 자가 어떻게 믿겠느냐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발견되었고 내게 묻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르되 “내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하루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10장의 마지막 이미지 — 하루 종일 손을 벌리고 계신 하나님. 거절당하면서도 다시 손을 내미는 자세다. 이 이미지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요약한다. 심판이 아니라 인내다. 그리고 이 인내가 11장의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다.

10장의 논리 사슬: 구원받으려면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 부르려면 믿어야 한다 → 믿으려면 들어야 한다 → 들으려면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 전파하는 자가 있으려면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 선교의 필연성을 이 사슬로 논증한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에서 인용하며 보여준다. 모세는 이미 이스라엘이 “미련한 백성”으로 시기받게 될 것을 예고했고, 이사야는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하루 종일 손을 벌리셨다”고 기록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0: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헬라어 τέλος(텔로스)는 “끝” 혹은 “목적·완성”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해석(종말론적 독해)과, 율법이 가리켜 온 목적지가 그리스도라는 해석(목적론적 독해) 사이에 학자들의 견해가 나뉜다. 맥락상 바울은 두 의미 모두를 담으려 했을 것이다 — 율법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는 것을 가리켜 왔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방향이 완성된다.

10:15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이사야 52:7 인용.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알리는 사자(使者)에 관한 시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 전도자에게 적용한다. 발이 아름다운 것은 그 발이 닿은 곳마다 좋은 소식이 들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