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1장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렀다

아버지의 기억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했다.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더 멀리 떠나갔다.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고 새긴 우상들에게 분향했다.

3 내가 에브라임에게 걷는 것을 가르쳤다. 그들을 팔에 안고 다녔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고쳐 준 것을 알지 못했다.

4 내가 사람의 끈 —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다. 내가 그들의 뺨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처럼 그들에게 이르렀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기울었다. 그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이 장은 호세아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이다. 앞 장들이 고발이었다면, 11장은 탄식이다. 법정 언어가 아니라 아버지의 목소리다. 걷는 것을 가르치고, 팔에 안고, 먹이를 주고. 이 구체적인 돌봄의 기억들이 나열된다.

1절 — 마태복음 2:15가 이 구절을 인용한다. 예수의 가족이 헤롯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했다가 돌아오는 사건에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를 적용한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 예수에게 다시 응하는 구조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 신약은 예수를 그 아들의 완성으로 읽는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

5 “그들이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앗시리아가 그들의 왕이 되지 않겠는가? 그들이 돌아오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6 칼이 그의 성읍들에서 맹위를 떨치고, 그의 빗장들을 부수어 없애고, 그들의 계책들을 먹을 것이다.

7 내 백성이 나에게서 돌이키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들이 높은 자에게 부르짖어도 그분이 그들을 높이시지 않겠다.”


하나님의 내면에서 싸우는 것들

8 “에브라임아,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내어주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아드마(Admah)처럼 만들겠느냐. 어떻게 너를 스보임(Zeboiim)처럼 놓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뒤집혔다. 내 긍휼이 함께 뜨거워졌다.

9 내가 내 타오르는 진노를 실행하지 않겠다. 내가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자다. 나는 진노하여 오지 않겠다.”

이 두 절이 호세아서의 심장이다. 8절 —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느냐.” 네 번의 물음이 연속된다. 이것은 수사 의문문이 아니다. 아버지가 실제로 버릴 수 없어서 몸부림치는 소리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한 성읍들(신명기 29:23)이다. 그 운명을 주어야 하는데 줄 수가 없다.

9절 — “나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논리로는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새롭게 정의된다. 거룩함이 ‘다름’이라면, 그 다름은 저울과 공정이 아니라 사랑의 집요함이다. 심판을 끝까지 들고 있으면서도 버릴 수 없는 것.


사자처럼 오실 것이다

10 “그들이 여호와를 따라 걸을 것이다. 그분이 사자처럼 부르짖으실 것이다. 그분이 부르짖으실 때에 자손들이 서쪽에서 떨며 올 것이다.

11 그들이 이집트에서 새처럼, 앗시리아 땅에서 비둘기처럼 떨며 올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살게 하겠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12 “에브라임이 거짓으로 나를 에워쌌다. 이스라엘 집이 속임으로 에워쌌다. 유다는 하나님과 함께 여전히 방황하고 신실하신 거룩한 자와 함께 방황한다.”

11절의 귀환 이미지 — 이집트에서 새처럼, 앗시리아에서 비둘기처럼 온다. 출애굽보다 더 크고 더 먼 귀환이다. 사방에서 흩어진 자들이 돌아온다. 포로기 이후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귀환을 예언한 것으로 읽어왔다.

다음 장 — 야곱의 이야기가 거울처럼 이스라엘에게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