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5장 멜기세덱의 반차
대제사장의 자격
1 모든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택함을 받아, 하나님을 위한 일에서 사람들을 대표하도록 임명된다. 죄를 위해 예물과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레위기 16장의 욤 키푸르(대속죄일) 예식이 배경에 있다.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하루,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위해 피를 뿌렸다. 그 자리는 아무나 설 수 없었다. 레위 계통이어야 했고, 아론의 자손이어야 했으며, 그 안에서도 하나님이 부르신 자여야 했다. 히브리서는 이 엄격한 선발 기준을 예수의 대제사장직을 논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2 그는 무지하고 미혹된 자들을 인내로 대할 수 있다. 자신도 연약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3 이 연약함 때문에 그는 백성을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한다.
레위 계통 대제사장의 한계가 여기 드러난다. 그는 백성을 위해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해 먼저 드려야 한다. 자신이 연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흠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백성과 같은 처지에 있음을 보여주는 설계다. 공감하는 중보자.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남의 죄를 영원히 해결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도 열려 있다. 예수의 대제사장직은 이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답한다 — 연약함은 공유하되, 자신을 위한 제사는 필요 없다.
4 이 영예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않는다. 아론(Aaron)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만 받는다.
“아론처럼” — 출애굽기 28-29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직에 임명되는 과정은 하나님의 명령에서 시작되었다. 아론이 스스로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합법적 제사장직의 기준이다. 자칭한 제사장은 인정받지 못한다. 하나님이 부르셔야 한다. 고라의 반란(민수기 16장)이 이 원칙을 어기려 했다가 심판받은 이야기다. 예수도 이 원칙을 따른다 — 그의 대제사장직은 시편 110:4의 하나님 선언으로 시작된다.
5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스스로 취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에게 말씀하신 분이 세우셨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6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말씀하셨다.
“너는 영원토록 멜기세덱(Melchizedek · ㉸ 멜키체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다.”
시편 110:4. 이 구절이 히브리서 전체의 열쇠 역할을 한다. 저자는 5장에서 처음 멜기세덱을 언급하고, 7장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이 한 줄 —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 — 이 히브리서 대제사장 신학의 기초다. 레위 계통의 아론 제사장직과는 다른, 더 오래된 제사장직의 계보가 있다는 논리다.
“반차(탁시스, τάξις)” — 질서, 서열, 방식을 뜻한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계자라는 뜻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대표하는 방식과 질서에 속한다는 뜻이다. 아론의 제사장직은 혈통에 의해 전수된다. 멜기세덱의 방식은 하나님의 직접적 임명에 의해 세워진다. 예수는 레위 계통이 아님에도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 근거가 멜기세덱의 선례다.
탄원과 눈물로
7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강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간구와 탄원을 드렸다. 그의 경건함으로 인해 들으심을 받았다.
8 그는 아들이셨지만, 겪으신 고난들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9 온전하게 되신 후에 그는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10 하나님께서 그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선포하셨다.
5:7은 게세마네 동산을 배경으로 읽힌다. “강한 부르짖음과 눈물” — 예수의 기도가 지적이고 평온한 것이 아니었음을 히브리서는 숨기지 않는다. “들으심을 받았다” —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인데, 죽음을 피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건지심을 받은 것(부활)으로 이해된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 신성과 완전함을 가진 아들이 굳이 배워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실제 고통 속에서, 순종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온전하게 되신 후에(텔레이오테이스, τελειωθείς)” —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했다(7:19). 그런데 예수는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 이것은 예수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고난을 받아 완전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을 완수하셨다는 것이다. 그 완성된 대제사장직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된다.
아직 어리다
11 이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이 많지만, 너희가 듣는 데 둔해졌으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12 이미 선생이 되었어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너희는 다시 하나님 말씀의 기초적인 가르침을 배워야 할 처지다. 젖이 필요한 상태로, 단단한 음식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다.
13 젖을 먹는 사람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14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연습으로 감각 기관들을 훈련하여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
히브리서의 날카로운 꾸짖음. 저자는 멜기세덱 신학이라는 고급 논증을 전개하려 하지만, 먼저 독자들의 영적 정체(停滯)를 직시한다. 이 부분은 자라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한다. “젖”과 “단단한 음식”의 비유는 이후 6장의 경고로 이어진다. 저자는 독자들을 어린아이로 머물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 어렵더라도 함께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아페이로스 로구 디카이오쉬네스, ἄπειρος λόγου δικαιοσύνης)” — “아페이로스”는 경험이 없는, 훈련되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지식이 없는 것과 훈련되지 않은 것은 다르다. 들었지만 소화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5:14의 “연습으로 감각 기관들을 훈련하여” — “연습(헥시스, ἕξις)“은 반복된 실천으로 형성된 습관을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용어다. 영적 성숙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훈련된 분별력이다. 저자는 자신이 전개할 멜기세덱 신학이 바로 그런 분별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미리 경고한다.
5장의 구조는 섬세하다. 1-4절에서 대제사장의 자격을 논하고, 5-10절에서 예수가 그 자격을 어떻게 갖추셨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다음 11-14절에서 갑자기 독자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한다. 이 전환은 논리의 단절이 아니다. 멜기세덱 주제가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그 어려움의 원인을 독자들에게서 찾는다. 저자는 독자들의 상태를 진단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앞으로 이끌 준비를 한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이 꾸짖음의 무게가 달리 읽힌다. 그들은 박해와 사회적 압박 속에 있었다. 회당 공동체로 돌아가면 안전하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남아 있으면 위험했다. 이 상황에서 “아직 어리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 수준의 평가가 아니다. 위기 앞에서 성숙한 반응과 미성숙한 반응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어린아이는 고통을 피한다. 성숙한 자는 더 좋은 것을 위해 고통을 견딘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숙을 선택하라고 촉구한다.
다음 장 — 기초를 떠나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는 촉구와, 히브리서 전체에서 가장 논쟁적인 경고 단락이 이어진다. 한 번 빛을 받고 타락한 자에 대한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