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9장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세우리라
다섯 번째 환상 — 단 옆에 서신 주
1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 계셨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문기둥 머리들을 쳐서 문지방들이 흔들리게 하라. 그것들을 그들 모두의 머리에 부숴라. 그들의 남은 자를 칼로 죽이겠다. 그들 가운데 달아나는 자가 달아나지 못하겠다. 피하는 자가 피하지 못하겠다.
2 스올을 뚫고 들어가도 내 손이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겠다. 하늘로 올라가도 내가 거기서 끌어내리겠다.
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어도 내가 찾아 거기서 끌어내겠다.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 깊이 숨어도 거기서 내가 뱀에게 명하여 물게 하겠다.
4 그들이 원수들 앞에서 사로잡혀 가도 거기서 내가 칼에게 명하여 죽이게 하겠다. 내가 그들에게 눈을 두겠다. 복이 아니라 재앙을 위해.”
이 환상은 가장 무겁다. 이전 두 환상(메뚜기, 불)은 아모스의 중재로 멈추었다. 세 번째(다림줄)는 중재가 없었다. 이제 다섯 번째 —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다. 스올, 하늘, 갈멜 꼭대기, 바다 밑. 시편 139편이 하나님의 편재를 사랑의 언어로 말한다면, 아모스 9장은 그것을 심판의 언어로 말한다. 같은 편재다. 다른 방향이다.
세 번째 송영
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땅을 만지시면 그것이 녹겠다. 그 안의 모든 주민이 슬퍼하겠다. 온 땅이 나일강처럼 솟아오르겠다. 이집트의 강처럼 내려가겠다.
6 그분이 하늘에 방들을 지으시고 하늘 꼭대기에 그분의 궁창을 세우시고 땅의 물들을 불러 바다 위에 쏟으신다.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같다
7 “이스라엘 자녀들아, 너희가 내게 구스(Cush · ㉸ 쿠시) 사람들과 다르냐?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올리지 않았느냐? 블레셋 사람들은 갑돌(Caphtor · ㉸ 카프토르)에서, 아람 사람들은 기르에서 이끌어 올리지 않았느냐?
8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죄를 지은 나라를 향하고 있다. 내가 그것을 땅 위에서 멸하겠다. 그러나 내가 야곱 집을 완전히 멸하지는 않겠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9 보라, 내가 명하여 이스라엘 집을 모든 열방 가운데서 흔들겠다. 곡식이 체에서 흔들리듯이. 한 알도 땅에 떨어지지 않겠다.
10 내 백성 가운데서 모든 죄인들이 칼에 죽겠다.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겠다. 우리에게 닥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자들이.”
7절 — 이것이 아모스 신학의 혁명적 지점이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출애굽이 구스(에티오피아)나 블레셋의 이주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사건이었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특권이 면죄부가 아니다. 8절에서 “완전히 멸하지는 않겠다”는 단서가 붙는다. 선택이 취소되지는 않았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
11 “그 날에 내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겠다. 그것의 틈들을 막겠다. 그것의 폐허들을 일으키겠다. 그것을 옛날 같이 세우겠다.
12 그러면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열방을 차지하겠다. 이것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다.”
11절 — 사도행전 15:16-17에서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선교를 정당화할 때 이 구절을 인용한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리라…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아모스가 선포한 회복이 이방인을 포함하는 새 공동체의 근거가 되었다.
마지막 회복
13 “보라, 날들이 오겠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밭 가는 자가 추수하는 자의 뒤를 따르겠다.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따르겠다. 산들에서 새 포도주가 떨어지겠다. 모든 언덕이 녹겠다.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간 것을 돌이키겠다. 그들이 황폐한 성읍들을 건축하겠다. 거기 살겠다. 그들이 포도원을 심겠다. 그 포도주를 마시겠다. 동산을 만들겠다. 그 열매를 먹겠다.
15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겠다. 그들이 내가 준 자기들의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않겠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마지막 세 절이 아모스서의 끝이다. 이 회복의 약속(9:11-15)을 어떻게 읽는가에 입장이 갈린다.
후대 편집설: 19세기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이 1892년 소예언서 주석에서 처음 제기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11절) 같은 표현은 BC 587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관점을 전제하므로, 포로기 이후 편집자가 BC 8세기 아모스의 심판 메시지를 완화하려 덧붙였다는 것이다.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의 1969년 BKAT 주석도 이 노선을 따른다.
본문 일치설: 셰일런 페인 스미스(Shalom Paul)의 1991년 헤르메니아 주석은 11-15절을 아모스 자신의 것으로 본다 — 심판 선지서가 회복으로 끝나는 패턴(호세아 14장, 요엘 3장)이 자연스럽고, 어휘도 아모스 본문과 통한다. 사도행전 15:16-18에서 야고보가 이 구절(11-12절)을 70인역 형태로 인용해 이방인의 교회 편입을 정당화한다.
패턴을 보면 — 호세아도 14장에서 회복으로 끝난다. 요엘도 3장에서 회복으로 끝난다. 아모스도 그렇다. 심판이 마지막이 아니다. 재판관이 동시에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밭 가는 자가 추수하는 자의 뒤를 따르겠다” — 13절은 풍요의 극치를 표현한다. 보통은 씨 뿌리고 기다려야 추수가 온다. 그 사이에 긴 계절이 있다. 그런데 회복의 날에는 그 간격이 사라진다. 심는 즉시 거둔다.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는 과잉이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목자로 시작했다. 여호와가 그를 불러 북왕국으로 보냈다. 그는 왕의 성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가 선포한 말씀은 사도행전에서 인용되고, 마틴 루서 킹의 연설에서 울리고, 오늘도 읽힌다. 한 목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길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