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서로 짐을 지라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서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펴보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으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니라.

2절과 5절이 모순처럼 보인다. “서로 짐을 지라”(2절)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니라”(5절). 그러나 두 절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다르다. 2절의 “바레”(짐)는 무겁고 압도적인 짐 — 혼자 들 수 없는 것이다. 5절의 “포르티온”(짐)은 각자가 짊어져야 할 분량, 책임의 몫이다. 서로의 과중한 짐을 나누되, 자기 책임은 각자가 진다.


가르침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격언은 고대 근동 전역에서 사용된 보편적 지혜다. 바울은 이것을 영적 원리로 전환한다. 심는 밭이 다르다 — 육체냐 성령이냐. 거두는 것도 다르다 — 썩어질 것이냐 영생이냐. 6절의 맥락에서 이 농업 비유는 재정적 지원을 포함한다. 말씀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도 성령을 위한 심음이다.


바울의 친필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Israel)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1절에서 바울은 받아쓰기에서 직접 필기로 전환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고대 서신 작성에서 저자는 서기(암누엔시스)에게 구술하고 마지막에 직접 몇 줄을 적어 자신의 서명으로 삼았다. “큰 글자”는 눈이 약했다는 추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4:15 참조).

12-13절은 유대화주의자들의 동기를 분석한다. 할례를 강요하는 이유가 신학적 확신이 아니라 박해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으면 유대교의 보호 아래 들어와 로마 당국의 압박을 피할 수 있었다. 바울의 눈에 그것은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인간적 계산이다.


마지막 인사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의 흔적(스티그마타)” — 스티그마는 노예나 군병의 몸에 새긴 주인의 표시, 혹은 가축에 새긴 낙인이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박해의 흔적들 — 채찍 자국, 돌에 맞은 상처 — 을 예수의 소유 표시로 읽는다. 세상이 자랑하는 할례 흔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따른 몸의 흔적.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논증이 이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은혜와 평강”으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1:3, 6:18). 전체가 은혜의 복음을 지키려는 분투다. 가장 논쟁적인 바울 서신이지만, 처음과 끝은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