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장 그리스도 찬가
한마음, 낮은 마음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2장 전체가 하나의 논증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권하는 것은 한마음이다. 그 한마음의 근거를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찾는다. 5절부터 나올 그리스도 찬가가 이 권면의 근거이자 모델이다.
그리스도 찬가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6-11절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성된 그리스도 찬가로 꼽힌다. 1928년 에른스트 로마이어(Ernst Lohmeyer) 가 처음 이 단락을 두 연·여섯 행의 운율적 찬송으로 분석한 이후, 바울 이전에 존재하던 초기 교회 찬송을 인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학계 다수다. 바울 고유 어휘가 아닌 단어(“형체”, “동등”, “비움”), 균형 잡힌 절 구조가 이 추정을 지지한다.
7절의 핵심어는 “비워”(헬라어: 에케노센)다. 신학 용어로는 케노시스(kenosis)다. 19세기 독일 신학자 고트프리트 토마지우스(Gottfried Thomasius, 1853) 가 정식화한 케노시스 신학은 그리스도가 신적 속성(전지·전능·편재) 일부를 실제로 포기했다고 읽었다. 이 입장은 정통 기독론에서 비판받았다 — 1909년 영국의 P.T. 포사이스(P.T. Forsyth) 가 변호했고, D.M. 베일리(Donald Baillie) 의 God Was in Christ(1948)가 비판했다. 현대 주석가 고든 피(Gordon Fee, 1995) 와 N.T. 라이트 는 케노시스를 신적 특권의 주장을 포기한 것으로, 곧 신적 속성의 자기 비움이 아니라 신적 권리의 자기 내려놓음으로 읽는다. 본문은 “비움”의 내용보다 방향을 말한다 — “종의 형체를 가지사.”
하강과 상승의 대조가 이 찬가의 구조다. 6-8절은 하강이다. 하나님의 본체 → 종의 형체 → 사람의 모양 → 십자가. 9-11절은 상승이다. 지극히 높여짐 → 모든 무릎 → 모든 입의 고백. 이 운동은 인간의 상식과 반대다. 가장 낮아진 자가 가장 높아진다.
11절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 이사야 45:23의 인용이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구약에서 하나님 야훼에게만 해당하던 절을 바울은 예수에게 적용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리스도 신성 선언 중 하나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2-13절은 흔히 인용되는 역설을 담는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인간의 행함)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의 행하심). 이 두 진술은 모순이 아니라 협동이다.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역사가 같은 사건의 두 측면이다. 행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소원과 행함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19 주 안에서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바람은 나도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써 기운을 얻으려 함이니라.
20 이는 내가 디모데 외에 너희를 진실히 돌볼 마음을 품은 자가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것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 일이 어떻게 될는지를 보는 대로 그를 속히 보내기를 바라며,
24 또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 · ㉸ 에파프로디토)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것을 심히 근심하는지라.
27 그가 실로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나도 덜 근심하게 하려 함이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보충하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투옥된 바울에게 보낸 대사다. 헌금을 전달하고 바울을 돌보다가 병이 들어 죽을 뻔했다. 바울은 그를 보내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를 존귀히 여기라고 당부한다. 이 몇 절은 초기 교회의 실제 네트워크 — 사람을 보내고 소식을 전하고 돌보는 — 를 보여주는 드문 창이다.